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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있는 곳(立場)이 다르면 같은 것을 보아도 다르게 보입니다. 서있는 자리, 서있는 위치에 따라서 같은 광경, 같은 사물과 사건이 다르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오늘 말씀에 바로 그 각자의 서있는 자리의 다름이 보이고, 그 서있는 자리의 다름으로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는 진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자리에 서야 하는가 하는 중요한 질문을 또한 던지고 있습니다.

먼저 하늘의 자리에 계신,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고 보고 계신 하나님의 입장입니다.

 

15 하나님이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 . 16 가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모아 놓고, 그들에게 일러라. '주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나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하고 말하면서 이렇게 전하여라. '내가 너희의 처지를 생각한다. 너희가 이집트에서 겪는 일을 똑똑히 보았으니, 17 이집트에서 고난받는 너희를 내가 이끌어 내어,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이 사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올라가기로 작정하였다' 하여라. 18 그러면 그들이 너의 말을 들을 것이다. 또 너는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데리고 이집트의 임금에게 가서 '히브리 사람의 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으니, 이제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을 걸어가서, 주 우리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하니, 허락하여 주십시오' 하고 요구하여라. 19 그러나 내가 이집트의 왕을 강한 손으로 치지 않는 동안에는, 그가 너희를 내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20 그러므로 나는 손수 온갖 이적으로 이집트를 치겠다. 그렇게 한 다음에야, 그가 너희를 내보낼 것이다. (출애굽기 3:15-18)

 

그리고 이어서 열 가지 재앙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 모든 상황은 세상의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시고, 주인이신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과 이집트 그리고 모든 세상에게 알리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왔습니다.

 

11 너희가 그것을 먹을 때에는 이렇게 하여라.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들고, 서둘러서 먹어라. . . 

39 그들은 이집트에서 가지고 나온 부풀지 않은 빵 반죽으로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구워야 하였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급히 쫓겨 나왔으므로, 먹거리를 장만할 겨를이 없었다. 40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에서 산 기간은 사백삼십 년이었다. 41 마침내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바로 그 날, 주님의 모든 군대가 이집트 땅에서 나왔다. ( 12:11, 39-41)

 

한시도 지체할 수 없다 하시어, 서둘러 먹고 서둘러 짐을 챙겨 서둘러 떠났습니다. “내일이면 늦다, 지금 오늘 지금 당장이어야 한다,” 그렇게 재촉하고 채근하셔서 시장 상인들 곗돈 들고 튀는 못된 계주의 야반도주도 아니고, 현재 자메이카 인구와 맞먹는 2백만에서 3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서둘러 길을 떠났습니다.

 

  1.  

그런데 아는 길도 돌아가고, 급할수록 돌아가라 하신 것인지, 상황은 이스라엘의 예상과 기대와는 다르게 돌아갑니다.  

 

“17 . . . 그러나 그들이 블레셋 사람의 땅을 거쳐서 가는 것이 가장 가까운데도, 하나님은 백성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바꾸어서 이집트로 되돌아가지나 않을까, 하고 염려하셨기 때문이다. 18 그래서 하나님은 이 백성을 홍해로 가는 광야 길로 돌아가게 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은 대열을 지어 이집트 땅에서 올라왔다. . .” ( 13:17-18)

 

이스라엘은 한시가 급한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아 보이십니다. 오히려 느긋하게 경치구경 하며 가자 하시는 것인지, 홍해를 거쳐 광야 길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블레셋 사람의 땅을 거쳐서 가는 것이 가장 가깝고 빠른데. 아무리 블레셋 사람들이 사납고 강하다 해도, 지금까지 이집트의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이야 블레셋과 싸울 생각만으로도 그들을 두려워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야 그들을 두려워하실 까닭이 없으실 텐데. . .  세상에서 가장 막강하고 강력한 이집트 그리고 이집트 파라오도 굴복시키신 하나님이신데, 그깟 블레셋 사람을 하나님께서 두려워하실 까닭이 있으셨을까 . . . 지금 이스라엘이 형편없고 변변치 않다는 것이야 이미 다 아실 하나님이시니 당신께서 손수 이끌어내신 이스라엘을 위해 한 번 더 나서시는 것이 무슨 대수일까 . . . 이집트와 이집트 파라오에게 하셨던 그 일을 한 번 더 하시면 될 것을 . . . 굳이 왜 이렇게까지 하실 이유가 있을까 . . . ? 이스라엘의 입장에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땅 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입장과 땅 위에 서있는 우리 사람의 입장의 차이는 너무 극명하게 다릅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라고 하지만, 사실 그 오늘 그 하루조차 잘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나 그 사람 잘 알아,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왜 그렇게 말하는지 다 알아, 네 맘 다 알아, 네 생각 다 알아라고 하지만, 정작 나도 나를 모른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른다하는 우리입니다. 결국 우리 사람이 서있는 자리는 한 평도 채 되지 않는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그런데 저 위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나를 보시고 아시고, 무엇보다 나를 창조하셨습니다. 나의 지금 서있는 곳, 내가 지금 가는 길, 가려고 하는 거기를 다 보고 다 알고 계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 . .’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그 첫 대목에서 나오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말은 곧 하나님의 입장입니다저 높은 곳에서 이 낮은 곳에 있는 나를 보시고 나를 아시는 하나님은 나의 온 길, 그리고 내가 지금 서있는 곳, 그리고 그 너머 지금 내가 가는 길에서 만나게 될 것들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미 나의 가는 길 그 끝에 가 계시고, 그 길을 함께 가시며,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언젠가 블레셋 사람들과 싸울 것이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아직은 너희가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아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이 버티지 못할 것이고, 그래서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려고 할 것이라는 것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자식인 우리는 모르는데, 자식인 나는 모르는데, 아버지는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게 서있는 자리의 차이, 입장의 차이에서 오는 자식이 이해할 수 없는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게 땅 위의 자식의 입장에 있는 우리의 모습이고, 하늘 위에서 자녀인 우리를 지켜보시는 아버지의 입장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 . .

 

21 주님께서는, 그들이 밤낮으로 행군할 수 있도록,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앞서 가시며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앞 길을 비추어 주셨다. 22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그 백성 앞을 떠나지 않았다. ( 13:21-22)

 

부모의 마음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되어 자식인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계십니다. 자식인 우리는 한시가 급한데, ‘나도 할 수 있어 엄마, 나도 다 알아 아빠. 나도 다 컸어 다 알아, 이제 나도 어른이라고’  하는 자식의 입장과 아직 아니다, 조금만 기다려하는 부모의 입장은 많이 다릅니다.

 

  1.  

그런데 . . .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으실까요?

 

1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오던 길로 되돌아가서, 믹돌과 바다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쪽 바닷가에 장막을 치라고 하여라. 3 그러면 바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막막한 광야에 갇혀서 아직 이 땅을 헤매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4 내가 바로의 고집을 꺾지 않고 그대로 둘 터이니, 그가 너희를 뒤쫓아 올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바로와 그 군대를 물리침으로써 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니, 이집트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서,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은 모세가 시키는 대로 하였다. (출애굽기 14:1-4)

 

이미 끝난 싸움입니다. 그런데 굳이 그러실 이유가 있으실까요? 도무지 하나님의 입장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이해했을까요? 모세는 다 이해했을까요? 인본주의가 아니라 신본주의다, 우리 신앙인들이 그런 말은 하지만, 인본주의는 그렇다고 해도, 과연 우리가 신본주의, 다시 말하며 신의 입장, 하나님의 입장에 우리가 설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이해하고 또 하나님의 생각과 뜻과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입장에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게 우리의 교만이고 오만이 아닐까요?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제 겨우 아이 낳고 부모가 되니 비로소 조금 그때 그 철 없던 나를 인내와 사랑으로 참아주신 내 부모를 조금 이해한다 하는 것이지. 그렇다고 해도 솔직히 다 이해한다 할 수 없는 우리인데. 그런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입장, 하나님의 자리에 서서 그 하나님을 다 안다 이해한다 할 수 있을까요? 나를 인내하시고 사랑하신 그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내가 다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러면 바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막막한 광야에 갇혀서 아직 이 땅을 헤매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v. 4)

꼭 그렇게 까지 하셔야 했을까요? 여전히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집트의 파라오입니다. 파라오 역시 하늘을 머리에 두고 땅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제아무리 저 높은 피라미드 꼭대기에 올라 세상을 호령하고 세상을 아래로 저만치 내려본다고 해도 땅 위에 세워진 피라미드일 뿐, 높고 화려하고 웅장해도 결국 땅 위에 서있는 무덤에 불과할 뿐입니다. 가겠다 해서 보내주었더니 얼마 가지 않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길을 잃었답니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사람의 입장, 사람의 경험과 생각에서 나온 인간적인 판단은  인간적인 결론을 내립니다.

 

5 이스라엘 백성이 도망쳤다는 소식이 이집트의 왕의 귀에 들어갔다. 그러자 바로와 그의 신하들은 이 백성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다. "우리에게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렇게 풀어 주어 놓아 보내다니, 어쩌자고 이렇게 하였는가?" 하고 후회하였다. 6 바로는 병거를 갖추고, 그의 군대를 이끌고 나섰다. 7 그는 특수병거 육백 대로 편성된 정예부대와 장교들이 지휘하는 이집트 병거부대를 모두 이끌고 나섰다. 8 주님께서 이집트의 왕 바로의 마음을 고집스럽게 하시니, 바로가, 주님의 보호를 받으면서 당당하게 나가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을 뒤쫓았다. ( 14:5-8)

  

내 것인데, 다 내 것인데, 왜 내가 가라 했을까, 내가 왜 보내주었을까? 잃은 것에 대한, 놓아버린 것에 대한, 지금 없는 것에 대한, 그리고 더 갖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입니다. 포기할 줄 모르고 내려놓을 줄 모르는 인간의 고집입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인간의 오만입니다. 땅만 넓은 줄 알고 그래서 땅만 바라보고 땅만 차지하겠다 하는 인간의 무지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지름길이 아닌 이리저리 돌리고 돌려 홍해, 붉은 바다 앞에 있다는 것을 막막한 광야에서 길을 잃어 갇혀 있다고 스스로를 믿게 만듭니다. 그것이 나의 기회라고, 내가 다시 세상의 왕이 되는 기회, 내가 정말 세상의 왕이고, 내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기회라고 믿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도무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붉은 바다, 홍해를 바라보는 파라오의 입장입니다. 그게 하나님을 바라보는 세상의 입장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을 바라보는 세상의 입장입니다. 저들이 믿는 하나님은 도대체 누구일까? 왜 저렇게 하는 것일까? 왜 저들은 그런 하나님을 믿는 것일까?

 

  1.  

그렇다고 이스라엘이 그 이집트의 파라오와 많이 다를까요?

 

9 마침내 바로의 모든 병거와 기마와 그의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된 이집트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여, 그들이 진을 치고 있는 비하히롯 근처 바알스본 맞은쪽 바닷가에 이르렀다. 10 바로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고개를 들고 보니,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추격하여 오고 있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크게 두려워하며, 주님께 부르짖었다. 11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며 말하였다. "이집트에는 묘 자리가 없어서, 우리를 이 광야에다 끌어내어 죽이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어내어, 여기서 이런 일을 당하게 하다니, 왜 우리를 이렇게 만드십니까? 12 이집트에 있을 때에, 우리가 이미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광야에 나가서 죽는 것보다 이집트 사람을 섬기는 것이 더 나으니, 우리가 이집트 사람을 섬기게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 14:9-12)

 

홍해, 검고 붉은 바다를 보고 절망과 좌절 속에 고개를 떨굽니다.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저 멀리 이집트 사람들이 추격해 오고 있습니다. 무섭습니다. 불안합니다. 걱정입니다. 그들이 두렵습니다. 사는 게 두렵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원망합니다. “왜 우리를 여기로 데려왔습니까? 차라리 이집트에서 죽게 놔두지 왜 광야까지 끌고 와서 죽게 만듭니까? 그때도 우리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그냥 내버려 달라고. 이럴 것 같아 그때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 예전 당신이 이집트 군인을 때려죽이고 광야로 도망쳤던 것처럼, 당신 혼자 도망을 하든 탈출을 하든 하라고. 광야까지 가서 죽느니, 이집트를 섬기고 파라오를 섬기고 이집트 신들을 섬기는 것이 훨씬 낫다고 그때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모세에게 쏟아내는 원망이지만 사실 하나님께 쏟아내는 원망입니다. 이 모두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집트 파라오와 이집트 군대에 대한 두려움, 세상에 대한 두려움,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 두려움이 예전 노예의 삶의 아픔도 서글픔도 힘겨움도 잊게 만듭니다. 사람들에게 혹시 잊히지나 않을까, 사람들에게 업신여기지나 않을까, 나를 함부로 하지나 않을까, 내가 성공 못하는 것은 아닐까, 승자가 못되는 것은 아닐까, 부자가 못되는 것은 아닐까,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명예를 잃지는 않을까, 건강을 잃지는 않을까 . . .  

세상에 대한 두려움, 현재에 대한 두려움, 내가 알지 못하는 내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그만 완전히 압도당하고 지배당합니다. 차라리 자유가 없던 그때가 좋습니다. 노예로 살았지만 그래도 안전하고 편안하고 별 일이 없던 그때가 좋습니다. 조금 노력하고, 조금만 더 하고, 조금 더 잘 하면 칭찬도 받고 보상도 있고 보호도 받고 그런대로 대접도 받았던 그때. 때론 주인이 된 듯 높은 사람이 된 듯 나름 남들 위에 있기도 했던 그리고 그럴 가능성과 기회가 주어졌던 그때가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때로 나 돌아갈래하며 정말 돌아가려 하고, 마음은 벌써 거기로 돌아갔고, 누구는 정말 돌아가기도 합니다.

 

  1.  

물론 우리에게 핑계도 있고 구실도 있고 이유도 나름 있습니다.

주님, 여기까지 온 것도 작지만 부족하지만 나의 믿음입니다. 물론 대단한 믿음은 아니지만 여기까지 오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도 있긴 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주님을 믿고 따라왔습니다. 준비한 음식 서둘러 먹어라 해서 먹었고, 손에 들고 머리에 이고 몸으로 끌 수 있는 것들만 겨우 꾸려서 서둘러 집을 나선 이 몸입니다. 어디로 가야 할 지 도무지 알 수 없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앞에 있어 그것 따라 왔습니다. 그러나 도무지 그 구름기둥과 불기둥 앞에 무엇이 있는지 오히려 볼 수 없고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믿음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 . . 막상 그 구름이 내 눈 앞에서 걷히니 기껏 도착한 곳이 여기, 아무것도 없는 광야, 검고 붉은 바다. 배신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냥 돌아가자니 벌써 날 죽이겠다 몰려든 이집트의 군대입니다. 금방 가나안으로 들어갈 줄 알았는데. . . 그건 아니어도 광야를 지나더라도 오아시스에서 오아시스로 그렇게 이동하며 갈 줄 알았지. 차라리 거기 이집트에서 노예로 사는 것이 훨씬 좋았습니다.”

 

두려움, 그리고 후회와 원망이 밀려옵니다. 하나님, 이집트를 떠나기 전에 미리 알려주셨다면, 내가 미리 알았다면, 미리 나에게 말씀을 하셨다면 그렇게 서둘러 떠나지는 않았을 것을. 미리 알아보고, 미리 꼼꼼히 따지고 준비하고 계획을 했을 텐데. . . 그런데 우리 미리 알았다면 떠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미리 알려주셨다면 우리는 감사함과 기쁨으로 거길 떠났을까요? 알면서 갈 수 있을까요 신앙의 길을? 어둠의 골짜기와 죽음의 계곡, 검고 붉은 바다와 무엇도 없는 모래먼지와 돌멩이만 구르는 광야의 길을 우리가 미리 알았다면 과연 신앙의 길을 떠났을까요?

그게 여기 홍해, 붉은 바다로 이끄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나를 믿고 가자, 내가 앞장 설 것이다. 내가 앞서서 갈 것이고, 내가 네 옆에서 함께 갈 것이고, 내가 네 뒤를 봐줄 것이다. 나를 믿고 가자. 멀고 길고 힘들고 고단한 길이다. 내 다 안다. 그러나 거길 지나야 한다, 길고 멀고 좁고 험하기까지 한 그 길이 그러나 생명의 길이다. 그 길 나를 믿고 나와 함께 가자.”  

 

  1.  

이스라엘을 노예로 삼았던 그때로 거기로 돌아가자 하는 이집트, 그리고 이집트의 노예로 살았던 그때 거기로 나 돌아갈래 하는 이스라엘. 그 작은 입장의 차이만 있을 뿐,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난 삶을 그리워하는 것에는 다 같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집트나 하나님이 아닌 이집트를 더 두려워하는 이스라엘이나 매한가지입니다. 우리는 어느 입장에 서 있을까요? 어느 입장을 선택할까요?

여기 하나님의 입장도 이집트의 입장도 이스라엘의 입장도 아닌 제 4의 입장, 바로 모세의 입장입니다.  

 

13 모세가 백성에게 대답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가만히 서서, 주님께서 오늘 당신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지켜 보기만 하십시오. 당신들이 오늘 보는 이 이집트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14 주님께서 당신들을 구하여 주시려고 싸우실 것이니, 당신들은 진정하십시오." ( 14:13-14)

 

하나님께 감히 가까이 갈 수 없고, 감히 하나님의 자리에 설 수 없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만, 그러나 또한 나를 부르시는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불타는 떨기나무가 있는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신발을 벗고 들어가, 그 하나님 앞에 서있는 모세입니다. 내가 서있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 그 하나님의 계신 곳 그 자리에 서있는 모세입니다. 그 자리는 믿는 자리, 믿음이라는 자리입니다. 그 믿음의 자리 내가 서있을 때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그 보이지 않는 세상, 그 참 세상, 새로운 현실이 비로소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예비하시고 그리고 앞으로 이루실 그 참 현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서있는 곳이 다를 때 그 보이는 것이 달라집니다.   

 

이집트 군대를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 너희가 두려워해야 할 한 분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 이건 우리의 싸움이 아니다. 이건 주 여호와 우리 주 하나님이 싸우실 싸움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어떻게 우리의 적과 싸우시는지 가만히 잠잠히 있어 지켜 보아라. 우리 생각과 마음에 이는 거친 파도, 우리 삶에 몰아치는 성난 폭풍을 잠잠하게 하시는 주님을 믿어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 구원을 약속하셨다, 승리를 약속하셨다. 오늘 그 모든 것을 이루실 것이다 하셨으니 그 말씀대로 하실 것이다. 주 여호와 하나님을 믿어라.”

하나님을 믿는 모세, 그 믿음의 자리에 서있는 모세가 보는 참 세상, 참 현실, 참 내일, 참 미래입니다.

 

  1.  

15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왜 부르짖느냐?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여라. 16 너는 지팡이를 들고 바다 위로 너의 팔을 내밀어, 바다가 갈라지게 하여라. 그러면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한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으며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17 내가 이집트 사람의 마음을 고집스럽게 하겠다. 그들이 너희를 뒤쫓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와 병거와 기병들을 전멸시켜서, 나의 영광을 드러내겠다. 18 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기병들을 물리치고서 나의 영광을 드러낼 때에, 이집트 사람은 비로소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 14:15-18)

 

모세의 울부짖음,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왜 내 기도에는 응답을 하시지 않으신 주님이 모세에게 응답을 하실까요? 모세의 부르짖음이 기도가 된 이유, 그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이유는 모세의 믿음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는 믿음, 그것을 이루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 우리와 맺으신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에서 나온 부르짖음, 그것이 참 기도입니다. 나의 믿음이 드러나는 것이 나의 기도이고, 그 나의 기도를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1.  

30 바로 그 날,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구원하셨고, 이스라엘은 바닷가에 널려 있는 이집트 사람들의 주검을 보게 되었다. 31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치신 주님의 크신 권능을 보고 주님을 두려워하고, 주님과 주님의 종 모세를 믿었다. ( 14:30-31)

 

여기 이집트에 대한 두려움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뀝니다. 이집트에 대한 두려움이 하나님께서 하실 일과 이루실 미래, 구원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과 소망, 그리고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바뀝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제 이집트의 파라오의 입장도 아니고, 이집트의 노예의 입장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후회와 절망과 좌절에 빠져 예전 노예 근성을 버리지 못한 옛 이스라엘의 입장도 아닙니다. 이제 그들은 모세의 입장에 서서 모세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나 혼자의 싸움, 우리만의 싸움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하나님의 싸움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를 너를 우리를 다시 노예로 삼겠다 아니면 죽이겠다 쫓아온 줄 알았는데, 사실은 하나님을 이겨먹겠다고, 하나님이 아닌 자기들이 우리의 왕이 되고 신이 되겠다고 쫓아왔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저  칼 들고 창 들고 말을 타고 전차를 몰아 싸우는 그런 물리적 싸움인 줄로만 알았는데 영적인 싸움, 영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이 이기신 것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 주님을 믿는 모세의 그 믿음을 보았습니다. 여기 모세의 믿음이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믿음입니다. 거친 광야를 걸어갈 때도 나를 이끄시는 주님을 믿는 믿음, 눈에 그 증거 보이지 않아도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보시고 계획하시고 준비하시고 예비하시고 나를 이끄시고 도우시고 보호하시고 나와 함께 이 길을 동행하시시는 주님을 믿는 믿음, 이미 그 길 끝에 가 계신 주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너희가 있을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먼저 하늘 아버지께 간다 하신 그 주님께서 벌써 내가 있을 곳을 아버지 하나님 집에 준비해 주셨고, 벌써 내가 앉을 잔칫상 자리를 예약해 놓으셨다는 그 말씀을 믿는 믿음입니다.

 

  1.  

우리가 정말 두려워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두려움은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온 우주만물의 참 주인이시며 참 왕이신,  내가 다 알지 못하고 내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경외입니다. 그 얼굴 직접 보면 내 눈이 멀까 차마 내 눈 제대로 뜰 수 없고, 그 음성 직접 들으면 내 귀가 찢어질까 차마 내 귀를 다 열 수 없고, 그 곁에 조금만 가까이 가도 나 금새 죽어 사라질까 싶어 차마 다가갈 수 없는 한 분 하나님. 그 하나님에 대한 우리 사람이 당연히 갖는 두려움.   

그런 나의 두려움을 주님은 잘 아시기에 구름기둥으로 불기둥으로 나의 앞에 계십니다. 구름으로 나를 덮으시고, 훨훨 타오르는 그러나 나를 태워 없애지 않는 포근한 불로 나를 보호하시는 그 한결 같은 사랑의 하나님을 우리가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집트 파라오와 그 군대를 두려워하는 폭력적 공포를 동반한 억지로 강요된 두려움과는 차원이 다른 자발적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에서 자발적으로 나오는 나의 응답이 바로 찬양이고 경배입니다. 그리고 그 찬양과 경배는 나의 자발적 믿음에서 또한 나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바로 여기 붉은 바다를 건너는 담대함과 용기를 낳는 것입니다.

 

출애굽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눈 앞에 있는 홍해, 그 붉은 바다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직 집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아닙니다. 계속해서 홍해가 나타나는 이유이고,  수시로 내 앞을 가로막는 이유입니다. 내 뒤에 있는 이집트 군대, 그 과거, 그 옛 사람과 옛 삶과 죽음과 죄가 한 번의 회개와 세례로 한 번의 찬양과 경배와 기도로 끝나지 않고 계속 쫓아오는 이유입니다. ‘다 이루었다’, 그 말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만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위해 대신해서 싸우신 싸움, 이미 승리하신 싸움 끝에 하신 말씀이고 또 하실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싸워야 할 싸움이 남아 있고, 살아야 할 삶이 있습니다. 달려가야 할 경주로가 아직 있습니다. 도심을 관통하는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보스턴 마라톤이 아니고, 밴쿠버의 하프 마라톤도 아닙니다. 멀고 길고 험한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장애물 달리기입니다. 순위도 없고, 경쟁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참가하는 것에 의미를 두는 올림픽도 아닙니다. 완주해야 합니다. 쉽지 않습니다. 주님이 나를 부르셔서 믿고 따라갔더니 앞에는 나를 집어삼킬 것 같은 검고 붉은 바다, 홍해이고. 돌아가자니 나의 노예가 되지 않으면 널 죽이겠다 서슬퍼런 칼을 든 적들이 기다리고 있고 또 달려들고.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걷고 뛰십니다. 내가 넘어지면 일으켜 주시고, 내가 지쳐 쓰러지면 나를 업고 뛰실 것입니다. 또 우리를 위해 싸우실 것입니다. 이건 그냥 나의 싸움, 우리의 싸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싸움입니다.

그런데 이미 이기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죄와 죽음을 이기셨고, 또한 부활을 통해 우리의 주가 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늘에 오르시어 우리를 위해 우리 있을 자리를 마련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를 지켜보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영으로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 이 땅에 살고는 있습니다. 우리의 서있는 자리는 여기 땅 위입니다. 그러나 이집트 피라미드 꼭대기도 아니고, 붉은 바다 절망의 절벽 끝도 아니고, 저들의 칼 끝도 아닙니다. 우리의 선 자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의 사랑과 은총 그 안입니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주님 안에 있어 오직 주님께서만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 있는 평화의 자리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어,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있어 두려움 없는 삶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