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와 이집트의 파라오가 아무리 막아서도 결국 하나님께서 승리하실 것이고,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유로이 이집트를 떠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것을 믿은 모세입니다.
4 그래서 모세가 바로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한밤중에 이집트 사람 가운데로 지나갈 것이니, 5 이집트 땅에 있는 처음 난 것이 모두 죽을 것이다. 임금 자리에 앉은 바로의 맏아들을 비롯하여, 맷돌질하는 몸종의 맏아들과 모든 짐승의 맏배가 다 죽을 것이다. 6 이집트 온 땅에서, 이제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큰 곡성이 들릴 것이다. 7 그러나 이집트의 개마저 이스라엘 자손을 보고서는 짖지 않을 것이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을 보고서도 짖지 않을 것이다. 이는, 나 주가 이집트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을 구별하였다는 것을 너희에게 알리려는 것이다.' (출애굽기 11:4-7)
그러나 이집트는 그리고 파라오는 그 말을 곧이 듣지 않을 것이고, 결국 이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모세는 믿음으로 알고 있습니다.
8 이렇게 되면, 임금님의 모든 신하가 나에게 와서, 내 앞에 엎드려 '당신과 당신을 따르는 백성은 모두 나가 주시오' 하고 사정할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은 다음에야, 내가 여기서 떠나겠습니다." 모세는 매우 화를 내면서, 바로 앞에서 나왔다. (출 11:8)
이제 금방 무슨 일이 당장 일어날 것 같습니다. 마침내 끝이구나, 파국이구나 . . .너는 죽고 우리는 살겠구나 . . . 뭘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질까 . . . 그런데 박진감 있고 긴장감 있고 속도감 있게 가던 드라마에 생각 못한, 느닷없는 장면이 끼어듭니다. 이제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이야기의 결말, 사건의 종결인 줄 알았는데, 정말 생경한 장면이 끼어듭니다. 한창 싸움이 치열한데, 그리고 이제 그 승부가 날 듯 싶은데, 마지막 한 방이면 모든 것이 끝이 날 듯 보이는 그 순간. 느닷없이 심판관이 끼어들더니 ‘밥 먹고 합시다’ 합니다.
남의 땅에서 노예로 살던 그 비참한 삶에서 벗어나 430년 동안 꿈꾸어 왔던 새로운 시대, 새로운 역사가 이제 막 시작하려고 하는 그 때, 그 결정적이고 최 절정의 순간, 클라이맥스를, 꿈에 그리던 승리를 코 앞에 둔 그 순간입니다. 너희는 이 달을 한 해의 첫째 달로 삼아 한 해를 이 달로 시작하여라,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대로 이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역사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밥 먹고 하자!’ 하십니다. 게다가 그냥 밥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밥을 장만하는 절차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냥 음식을 맛있게 만드는 레시피가 아니라 반드시 지켜야 할 그것도 까다롭고 번거로운 규례이고 규칙이고,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 앞으로도 죽 계속해서 지켜야 할 규례이고 또한 일정 기간을 포함한 절기입니다. 왜 그러실까요?
"너희는 이 달을 한 해의 첫째 달로 삼아서, 한 해를 시작하는 달로 하여라.” (출 12:2)
이것과 유사한 장면이 또 있었습니다. 땅 위에 홍수가 사십 일 동안 계속되었고, 그 불어난 물이 백오십 일 동안 땅을 뒤덮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 하나님께서 노아와 방주에 함께 있는 모든 들짐승과 집짐승을 돌아보실 생각을 하시고, 땅 위에 바람을 일으키시니, 물이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 . .
13 노아가 육백한 살 되는 해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 땅 위에서 물이 다 말랐다. 노아가 방주 뚜껑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니, 땅바닥이 말라 있었다. 14 둘째 달, 곧 그 달 스무이렛날에, 땅이 다 말랐다. 15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16 "너는 아내와 아들들과 며느리들을 데리고 방주에서 나가거라. 17 네가 데리고 있는, 살과 피를 지닌 모든 생물들, 곧 새와 집짐승과 땅 위에서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데리고 나가거라. 그래서 그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게 하여라." (창 8:13-17)
새로운 창조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집트의 상황과는 다릅니다. 그때 노아에게 그것은 정말 시작의 순간이었습니다. 싹 쓸어버린 후 남은 것이 없었고, 그러니 새로운 시작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이집트는 아닙니다. 거기 여전히 노예로 살고 있는 모세와 이스라엘에게는 아직 아닙니다. 오히려 상황은 더욱 좋지 않습니다. 거리로 나가기 무섭습니다. 적진 한가운데 있는 꼴입니다. 아직 끝이 아닙니다. 그러니 시작일 수 없습니다. 끝이 나지 않았는데 시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빨리 끝내시죠 하나님. 그래야 뭐든 시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새로운 시작이라고 하기엔 조금 생뚱맞습니다.
3 온 이스라엘 회중에게 알리어라. 이 달 열흘날 각 가문에 어린 양 한 마리씩 곧 한 가족에 한 마리씩 어린 양을 마련하도록 하여라. 4 한 가족의 식구 수가 너무 적어서, 양 한 마리를 다 먹을 수 없으면, 한 사람이 먹을 분량을 계산하여, 가까운 이웃에서 그만큼 사람을 더 불러다가 함께 먹도록 하여라. 5 너희가 마련할 짐승은 흠이 없는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가운데서 골라라. 6 너희는 그것을 이 달 열나흗날까지 두었다가, 해 질 무렵에 모든 이스라엘 회중이 모여서 잡도록 하여라. 7 그리고 그 피는 받아다가, 잡은 양을 먹을 집의 좌우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라야 한다. 8 그 날 밤에 그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기는 불에 구워서, 누룩을 넣지 않은 빵과 쓴 나물을 곁들여 함께 먹어야 한다. 9 너희는 고기를 결코 날로 먹거나 물에 삶아서 먹어서는 안 된다. 머리와 다리와 내장 할 것 없이, 모두 불에 구워서 먹어야 한다. (출 12:3-9)
나중에 양을 잡든 염소를 잡든 해도 좋을 텐데. 나중에 제대로 잔치를 벌이고 축제를 열어도 될 텐데. 나중에 해도 좋을 듯 싶은데, 나중에 탈출해서 거기 광야든 시내산이든 아니면 성막을 다 지어놓고 해도 좋을 텐데. . . 왜 굳이 오늘 이 밤을 그날로 잡으실까요? 나중에 하라고 하셔도 될 텐데. 내일 걱정은 그렇다 쳐도 오늘 걱정도 태산인데. 정말 여기를 빠져나가게 될 지 아닐지, 그날이 내일이 될지 언제가 될지 모를 판국에 마치 다 이루어진 일이라는 듯, 내일 벌일 잔치 오늘 하자, 몇 달 후 있을 축제 그냥 오늘 벌이자, 내일 먹을 것을 오늘 먹어버리자 하듯 왜 오늘 그렇게 하라 하실까요, 그것도 이렇게 번잡하고 복잡하고 까다롭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지역은 비껴갔지만 여전히 재앙의 어두운 그림자가 온 이집트를 덮고 있습니다.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한 이집트입니다. 그런데 연이어 닥치는 재앙들 속에 무슨 정신으로 그것도 노예들이 무슨 신나는 일이라도 일어나서 축제라도 벌어진 양 양을 잡고 염소를 잡아 구워 먹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아시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을 보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모든 것을 이미 아시고 이미 보신 분, 그 분이 바로 그 일을 하시는 분이시고, 이미 하신 분이시라는 사실, 그걸 우리는 놓치고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것, 하나님이 주권자시라는 것을 우리는 자주 잊고 삽니다.
나는 곧 나다. 내가 말하는 것은 곧 이루어질 것이고,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나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영원히 한결 같은 하나님이다. 내일을 보시고 내일을 아시고 이미 내일의 일을 끝내신 그 하나님께서 오늘도 모르는 채로 겨우 오늘만 아둥바둥 사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근심하지 말아라, 불안해하지 말아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곧 너의 주 여호와 하나님이다. 나를 믿어라. 내가 한 일을 보고 듣고 그리고 믿어라. 너희가 믿는다면 이제 내가 앞으로 너희를 위해 할 그 일도 믿어라.
지금 하나님께서 제정하시는 여호와의 유월절은 앞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실 그 일을 믿고, 내가 온 세상의 주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그리고 믿음으로 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고, 그리고 믿음으로 따르고 믿음으로 살아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까다롭고 번거롭고 시간도 많이 들고 노력도 많이 들고 사실 조금 귀찮기도 할 만큼 그 과정과 절차를 지키라 하실까요?
사실 기억을 위한 과정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쉬운 만큼 쉽게 잊고 어려운 만큼 쉬이 잊기 어렵습니다. 사랑의 기억은 나와 그 사람이 나눈 그 사랑의 시간과 세월과 정성과 노력과 마음, 그와 나눈 기쁨과 슬픔과 아픔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두께 만큼만 우리의 가슴에 남습니다.
지금 이렇게 복잡하고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양과 염소를 고르고, 혹시나 누가 실수 할까 싶어 모여 함께 양과 염소를 잡고, 굳이 그 피는 따로 모아서 각자 집의 문설주에다 바르고, 삶거나 하지 말고 굳이 불에 구워 먹어야 하고, 굳이 누룩을 넣지 않은 덜 부풀고 맛 없는 빵과 게다가 쓰디쓴 나물을 곁들여서 먹어야 하고, 먹는 것도 맘대로가 아니라 불편하게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한 손에 지팡이를 들고 먹어야 한다는 그 지침은 그 하나님과 나의 관계, 우리와의 관계가 그리 쉬운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하나님이 우리가 쉽게 그리고 함부로 할 그런 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지금 하시려고 하시는 그 일이 얼마나 위대하고 큰 일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 와중에 그런 과정과 절차와 시간과 노력과 또한 내가 가진 것을 내어놓는 믿음 그리고 복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그것을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 내 손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고 소망하는 그 믿음, 그것은 또한 복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 . .
10 그리고 너희는 그 어느 것도 다음날 아침까지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 아침까지 남은 것이 있으면, 불에 태워 버려야 한다. 11 너희가 그것을 먹을 때에는 이렇게 하여라.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들고, 서둘러서 먹어라. 유월절은 주 앞에서 이렇게 지켜야 한다. (출 12:10-11)
다음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고, 남은 것은 불에 태워버리야 합니다. 사실 남길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기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람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뒤를 돌아보는 것이 습관이고 버릇입니다. 늘 뒤를 생각합니다. 늘 혹시나 합니다. 그게 지혜롭고 영리한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러지 말라고 하십니다. 나를 믿어라, 나를 믿고 따라라, 나를 믿고 여기서 나가라, 돌아갈 일 없다.
그런데 먹을 때도 곧 떠날 사람처럼 서둘러 먹어라 하십니다. 지체하지 말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나를 믿고 떠나라, 우물쭈물하다 놓친다 서둘러 먹어라, 기차 출발한다 . . . 지금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그 모든 과정은 꼬치꼬치 따져가며 하라 하시더니 먹을 때는 정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듯 서둘러서 먹으라고 하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떠날 준비는 신중하고 천천히 인내심을 갖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길고 복잡하고 시간도 돈도 노력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게 맞을까, 내가 맞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 내가 옳게 사는 것일까, . . . 그래서 거기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순종이 따라야 합니다. 새로운 시작, 회복, 갱신, 각성, 그리고 구원으로 향한 길, 하나님 나라로 향한 길은 믿음으로 준비하고 시작해서 순종으로 복종으로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순종과 복종은 믿음에서 나오고, 믿음은 순종과 복종으로 다져지고 성장합니다.
그리고 죄에서 어둠에서 그 탈출의 순간은 단호한 만큼 신속해야 합니다. 어떤 다른 생각, 다른 유혹, 다른 걱정과 불안과 근심이 들어올 틈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는 결단의 순간이 있습니다. 믿음의 발을 한 발 더 내딛어야 할 순간이 찾아옵니다. 언제까지 돌다리를 두들기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의 도약이 필요합니다. 신앙의 여정에는 항상 우리의 믿음의 도약, 낭떠러지처럼 보이고 길이 끊겨 보이는 거기 내 한 발을 과감하게 내딛는 믿음의 도약이 요구되는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그 고난의 순간들이 바로 믿음의 도약을 요구하는 때입니다. 나의 믿음은 왜 자라지 않을까? 그 질문에 답은 그 고난의 순간들을 내가 어떻게 넘어서느냐 입니다. 대나무의 매듭이 있는 이유입니다. 우후죽순의 순간은 계속되지 않습니다. 비바람과 눈보라의 고난을 이겨낸 후 하나의 매듭이 생깁니다. 고난을 이겨낸 성숙함의 증거입니다. 그리고 다음 매듭이 지어질 때까지 대나무는 자랍니다. 그렇게 대나무는 자라고 숲을 이루어 불어오는 바람에 꺾이지 않고 오히려 아름다운 소리를 냅니다.
지금까지 내린 아홉 가지의 재앙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특별히 요구되는 것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을 구별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열 번째 재앙은 다릅니다. 물론 이번에도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집트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을 구별하십니다.
7 그러나 이집트의 개마저 이스라엘 자손을 보고서는 짖지 않을 것이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을 보고서도 짖지 않을 것이다. 이는, 나 주가 이집트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을 구별하였다는 것을 너희에게 알리려는 것이다.' (출 11:7)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12 그 날 밤에 내가 이집트 땅을 지나가면서,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이집트 땅에 있는 처음 난 것을 모두 치겠다. 그리고 이집트의 모든 신을 벌하겠다. 나는 주다. 13 문틀에 피를 발랐으면, 그것은 너희가 살고 있는 집의 표적이니, 내가 이집트 땅을 칠 때에, 문설주에 피를 바른 집은, 그 피를 보고 내가 너희를 치지 않고 넘어갈 터이니, 너희는 재앙을 피하여 살아 남을 것이다. (출 12:12-13)
이번에는 너희 역시 너희 스스로를 구별하여라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살고 있는 집의 표적, 표식이 될 것이다, 즉 너와 네 가족이 살 수 있는 표식이다, 너희가 살 방법, 너희가 살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양의 그 피를 너희가 직접 너희 집 문 문설주에 바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실까요? 우리는 착각합니다, 이스라엘이 의로워서, 그리고 우리 사람이 의로워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렇게 착각합니다. 큰 오해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이 비록 이집트와 이집트 파라오라는 정의롭지 않고 공평하지 않으며 자비가 없는 세력과 권력의 폭력과 억압 속에 철저한 피해자로 있는 것은 분명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죄가 없고 흠이 없고 잘못이 없는 순결하고 무죄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9 그러면 무엇을 말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유대 사람이 이방 사람보다 낫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다같이 죄 아래에 있음을 우리가 이미 지적하였습니다. 10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11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12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로마서 3:9-12)
우리 모두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할 죄인이지 의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 역시 이집트 백성과 마찬가지로 죽음 앞에 선 나약한 존재, 상징적으로 말하면 이집트라는 그 비참 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구원을 받았다, 그것은 내가 얻어낸 것이 아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은혜입니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은 내가 그걸 받을만하지 않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이고 또 내가 죄인이라는 고백입니다. 구원이 여기 여호와의 유월절의 어린 양의 피로 나에게 주어졌다는 것, 그것이 유월절의 신비이고 유월절의 은총이고 그래서 유월절을 앞으로 대대손손 지켜야 한다고 주님께서 명령하신 이유입니다.
22 그런데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것인데, 모든 믿는 사람에게 미칩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못 미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24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는 선고를 받습니다. 25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속죄제물로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피를 믿을 때에 유효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주심으로써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롬 3:22-25)
유월절 어린 양의 피,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표식이며 동시에 그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복종의 표식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 피를 내 집 문설주에 바르는 것, 내가 들고 나는 그 모든 것을 주님께서 아시고 나와 함께 계신다, 그 주님을 내가 믿고 의지하고 그 주님의 말씀과 명령에 내가 따른다, 그래서 그 피는 우리 생명의 표식입니다. 율법도 아니고, 할례도 아니고 예루살렘 성전도 아닙니다.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입니다.
‘내’가 이집트 땅을, 문설주에 피를 바른 집의 그 피를 ‘내’가 보고 ‘내’가 너희를 치지 않고 넘어갈 것이라는 것. 즉 그 어린 양의 피는 우리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12 그 날 밤에 내가 이집트 땅을 지나가면서,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이집트 땅에 있는 처음 난 것을 모두 치겠다. 그리고 이집트의 모든 신을 벌하겠다. 나는 주다. 13 문틀에 피를 발랐으면, 그것은 너희가 살고 있는 집의 표적이니, 내가 이집트 땅을 칠 때에, 문설주에 피를 바른 집은, 그 피를 보고 내가 너희를 치지 않고 넘어갈 터이니, 너희는 재앙을 피하여 살아 남을 것이다. (출 12:12-13)
어린 양의 피, 그리고 문설주에 바르는 것은 하나님 당신께도 중요합니다. 여기 이스라엘이 문설주에 피를 바르는 이유는 이집트 파라오나 이집트 군인들이 쳐들어와 그들을 죽일까 해서 바르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앗아가실까 해서 바르는 것입니다. 생명을 주신 하나님, 그러나 그 생명을 거두시는 하나님,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께서 그 피가 문설주에 발라져 있는 것을 보시면 거기를 그냥 건너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의인이 하나도 없지만, 그러나 그 모든 사람이 영원한 죽음에 빠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나 목적이 아닙니다. 구원입니다. 그 피를 보면 내가 거기를 지나치겠다, 구원을 베풀겠다, 그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그 양의 피는 너무 중요합니다. 그러니 유월절을 준비하는 그 긴 과정과 복잡함은 당연한 것입니다.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음이 나를 알아서 피해갈 것이다? 아닙니다.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순종과 복종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유월절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 그 순종과 복종은 유월절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이고 순종이고 복종입니다.
유월절은 끝이면서 동시에 시작입니다. 노예의 삶의 끝이고 자유인의 삶의 시작입니다. 유월절의 그 음식은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 하나님 나라로 향한 길을 떠나는 여행자, 순례자를 위한 정찬입니다. 여기서 저기로 길을 떠나는 길 떠나는 가족이 여기서 장만해서 먹는 마지막 식사이며 저기를 향해 길 떠나는 그 첫 식사입니다. 그 준비는 길었고 요란했고 힘겨웠지만 그 지체할 시간이 없이 서둘러 먹어야 합니다.
24 여러분은 이 일을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이 지킬 규례로 삼아, 영원히 지키게 하십시오. 25 여러분은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거든, 이 예식을 지키십시오. 26 여러분의 아들딸이 여러분에게 '이 예식이 무엇을 뜻합니까?' 하고 물을 것입니다. 27 그러면 여러분은 그들에게 '이것은 주님께 드리는 유월절 제사다. 주님께서 이집트 사람을 치실 때에, 이집트에 있던 이스라엘 자손의 집만은 그냥 지나가셔서, 우리의 집들을 구하여 주셨다' 하고 이르십시오." 백성은 이 말을 듣고서, 엎드려 주님께 경배를 드렸다. 28 이스라엘 자손은 돌아가서,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명하신 대로 하였다. (출 12:24-28)
예식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것이며 섬긴다는 것입니다. 지금껏 이집트의 파라오를 비롯한 거기 거짓 신들을 섬기고 경배했다면, 이제부터는 오직 주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지금껏 이집트 파라오의 명령을 들었다면, 이제부터는 온 세상의 왕이신 주 하나님의 명령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 가지 않아 이들 역시 이집트 백성처럼 하나님을 등질 것이라는 것을. 이집트 사람들이 파라오가 아닌 모세를 위대하게 생각했던 것 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이 파라오를 오히려 그리워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여기 27-28절에서 보이는 백성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엎드려 주님께 경배하고 또한 명하신 대로 모든 것을 다 했지만, 머지않아 고개를 빳빳이 들고 그 정반대의 길로 가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유월절만 제정하신 것이 아니라 무교절 또한 제정하셨습니다.
15 "너희는 이레 동안,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빵을 먹어야 한다. 그 첫날에 너희는 집에서 누룩을 말끔히 치워라. 첫날부터 이렛날까지 누룩을 넣은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스라엘에서 끊어진다. (출 12:15)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이제 유월절로 새로운 시작, 새로운 시대,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으니 여기를 벗어나 저기로 가면 그때부터는 다 잘될 것이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우리가 가고 싶은 길로 원하는 길로 가기만 하면 된다, 앞으로 나에게 우리에게 꽃길만 있을 것이다, 이제 그 길을 걷기만 하면 된다, 모든 것은 주님께서 알아서 다 해주실 것이다? 아닙니다. 여호와의 유월절만 지킬 것이 아니라 이어진 무교절을 지켜야 합니다. 무교절을 놓치면 안 됩니다. 그걸 놓치면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은 서둘러 먹고도 남았던 그래서 할 수 없이 불에 태워버렸던 그 아까운 많은 양고기와 염소고기가 그리워 자꾸 뒤돌아보며 이집트를 그리워하는 불만과 불안과 불면의 광야의 길이 될 뿐입니다. 애써 들어간 가나안의 삶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는 것에 멈추지 않고, 출애굽의 그 순간을 기억하고, 그리고 그 유월절의 어린 양의 그 흘린 피, 그리고 내 집 문설주에 발랐던 모습을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는 삶. 그것이 무교절을 지키는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야 할 거룩한 삶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그 거룩한 삶으로 부르시는 하나님, 그 초대에 응답하는 것, 그것이 무교절을 지키고 따르는 신자의 삶, 거룩한 삶, 성화의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오늘 무교절 말씀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6 . . . 여러분은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게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7 여러분은 새 반죽이 되기 위해서,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십시오. 사실 여러분은 누룩이 들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습니다. 8 그러므로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악독이라는 누룩을 넣은 빵으로 절기를 지키지 말고, 성실과 진실을 누룩으로 삼아 누룩 없이 빚은 빵으로 지킵시다. (고린도전서 5:6-8)
하나님의 유월절의 어린 양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의 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 새 삶을 위해 따로 구별된 우리는 가만히 손 놓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맘대로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살아가는 삶이 아닙니다. 예전의 삶에 발목 잡힌 삶도 아닙니다. 엉거주춤 양쪽에 걸친 삶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으로 새 사람이 된 나, 이집트에서 빠져나온 나, 구원받은 나의 모습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실과 진실, 순전함과 진실함, 그리고 진리를 살아가야 합니다.
흔히 한국사람은 밥심으로 산다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는 생명의 빵이다 하신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삽니다. 여호와의 유월절의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의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 그것은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먹고 마시고 나누는 사람들로 도무지 함부로 살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새로운 시대, 새로운 역사를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애써 탈출한 이집트로 돌아갈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드리우는 이집트의 그림자로 인해 여전히 삶 구석구석 불안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때로 겁과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하지만, 그러나 여호와의 유월절 어린 양,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인의 삶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나의 안에 우리 가운데 시작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역사, 새로운 창조입니다. 우리 모두는 구경꾼이 아니라 참여자이고 주역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그러나 이미 주님께서 이루신 것에 소망을 두고 우리의 마음의 눈을 두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 무교절의 거룩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다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을 살아가야 할 우리입니다.
오늘 할 일 내일로 미뤄도 됩니다. 그러나 굳이 내일 걱정 죄다 오늘로 당겨 할 이유는 없습니다. 대신, 내일 맛볼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오늘로 당겨 기쁨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박수치고 환호하며 깔깔거리는 기쁨이 아닙니다. 다 잘될 거야 하는 긍정의 힘 따위에서 나오는 그런 쉬운 기쁨이 아닙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이루시고 또한 약속하신 구원의 주님을 신뢰함으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음으로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묵직한 기쁨입니다.
여호와의 유월절의 믿음, 인내, 순종과 복종의 기쁨, 그리고 겸손과 절제, 그리고 서로 나누고 서로 섬기고 서로 사랑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성실과 진실을 누룩으로 삼아 누룩 없이 빚은 빵으로 살아가는 무교절의 경건한 삶의 기쁨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